제목: 주 예수의 은혜로

본문: 행 15:1-11


여러분은 그런 경험들이 있으십니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정거장에 서게 되면, 밖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칠 때,  ‘저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 지는 것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버스를 기다리다가, 수 없이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서로의 시각은 매우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관점(viewpoint)의 차이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관점에서 저를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짧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그 이후로 계속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 모두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제 길을 갔고, 그 많은 사람들도 각자 자기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온 세상에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세상이 참 크게 보였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참 바쁘시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모두는 자기 관점에서 보고, 사고하고 판단합니다. 자기 관점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의 한창 무르익은 열기를 식게 만드는 일이 일어 났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문제가 없었던 안디옥 교회에 논쟁 거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을 가르칠 정도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아니면 자신들이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했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유대’, 곧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권위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 안에 논쟁이 생겼습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가 그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과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을 벌였나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또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복음을 최초로 헬라인에게도 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나바가 목회자로 파송을 받고 바울과 함께 머물며 일년 동안 가르쳤던 교회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교회입니다. 흉년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오히려 부조하던 교회입니다(11:26-30). 선지자들과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13:1).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 선교를 위해 최초로 파송했던 교회입니다. 참 모범적인 교회였고, 또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가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투고 논쟁했다는 것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분명한 자신들의 입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가 바울과 바나바의 권위로 묵살해 버리거나, 그래서도 안 되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미묘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왜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준과 경험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유대인들만의 교회였습니다. 모두 할례를 받았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교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가르치기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는 매우 중요한 언약의 징표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느냐의 문제와 상관 없이, 자신들이 선민이라 구별하는 표징으로 할례를 여겼습니다. 그런데 감히 어디서 이방인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형제들이 바울과 바나바와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보면, 형제들도 바울과 바나바의 변론보다 더 확실한 지지를 받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보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대답이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고 여겼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솔즈베리 감리교회 목사의 대답 보다 워싱톤 모 교회의 목사님 대답이 훨씬 더 권위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로부터 문제가 시작 되었으니, 문제가 시작된 곳에서 실마리를 풀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하여튼 이 논쟁거리를 풀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그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납니다. 문제가 시급했다면, 곧장 예루살렘으로 직행할 것이지, 그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였습니다. 실은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문제도 될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형제들이 자신들을 예루살렘의 권위를 얻어오라고 작정하여 보내는 형제들에게 전혀 서운한 마음도 없이 가는 곳마다 선교 보고를 하면서 갔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작은 문제가 교회를 분열 시키고, 교회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정말 본질적인 문제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워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라면 적절히 무시하며 넘어갈 수도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결판을 내겠다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대답을 얻어 오라고 보내는 형제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다 드러냈다면, 오히려 안디옥 교회는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이미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시비에 걸려 넘어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어떤 대답을 해줄까 하는 마음을 졸이지도 않습니다. 사명에 붙잡힌바 된 사람들은 그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하는 데 전념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난 후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안디옥의 형제들이 자신들을 보냈던 것이 서운했다면, 그리고 그 어떤 사람들과의 다툼과 변론 때문에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면, “글쎄 여기서 온 어떤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디다.”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을 받은 후,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안디옥 교회에 일어난 할례에 대한 논쟁을 언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문맥의 분위기로 보면, 너무도 태연하게 선교 보고를 하는 바울과 바나바가 못마땅한 바리새파 중 믿는 어떤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분위기 깨는 소리를 지금 던지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Up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꼭 분위기 깨는 역할을 도맡아서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사실 불쑥 분위기를 깨는 “할례”의 문제를 던지고 있는 바리새파 중에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 갔던 어떤 사람들의 배후나 동조 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내용을 어찌 알았으며, 또 그 일을 먼저 꺼냈겠습니까?

 

이 논쟁이 끝난 후에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를 편지로 써서 보내는 본문을 보면, 안디옥에 온 그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행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그러니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갔던 어떤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무리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일부러 밝히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의 잘못은 너그럽게 덮어주고 문제는 명확히 짚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리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던 말 그대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가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좀 행세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 출신이라는 그 권위를 내세워 안디옥 교회 형제들에게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흥하고 있는 교회, 선교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교회에 가서 한다는 일이, 고작 말로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라고 해도 아무짝에 쓸모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변변치 못하면 다른 것을 내세웁니다. 내가 어디 출신이다. 누구를 잘 알고 있으며, 어디서 배웠고, 얼마의 재산이 있고 등등 자랑을 늘어 놓습니다. 하지만 진짜 진국인 사람들은 그런 꾸밈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람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믿음의 진국인 사람들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한 가지 만으로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사도와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도 이 문제를 처음 대하는 것이라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말을 길게 이어갑니다만, 제 눈에 들어온 베드로의 화법을 보면 주어가 ‘내’가 아닙니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계속되는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 관점을 갖기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경험하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의도 그렇습니다. 회의 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회의를 하는 것은 민주적인 절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모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하셨는지, 또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 모여 의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면 논쟁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많은 변론 후에 일어나 말하는 내용의 핵심은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게 하시고,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는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냐는 것입니다.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 확언합니다.

 

할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도 분명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오래된 버전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신 분이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 방법을 바꾸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도 업그레이드, 업데이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옛 기준을 가지고 얽매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버전의 은혜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우리나 저희나 동일하게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율법에 대한 헌신이 아까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먹을 거 못 먹고, 절제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구원받기 위해 살아 왔는데,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못마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켜온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읽지는 않았지만, 베드로의 말에 대한 반응이 다음 12절에 이어집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더 이상 논쟁이 계속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논쟁이 때로는 교회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논쟁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교회를 파괴하고 해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논쟁을 끝낼 수 있는 정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그 문제가 먼저 된 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문제를 삼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먼저 입은 사람들입니다. 먼저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기득권을 갖거나 특권을 갖게 되는 이유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바로 우리가 이방 기독교인이요, 나중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여전히 우리와 저희를 나누고 있다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요즘 컴퓨터는 참 쉽습니다. 일반 가전제품처럼 전원을 켜고, 마우스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인 하드웨어, 그 기계를 돌리는 OS(Operating System, Windows XP, Vista, 7 etc), 그리고 필요한 작업을 하게 도와주는 프로그램들(Word, Excel, Photo Shop etc)입니다. 더 좋은 성능의 컴퓨터가 되려면, 이 세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가 모두 업그레이드 되어야 최상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만이 아니라, 더 좋은 카메라, TV, 오디오, 자동차, 집 등등 이미 갖고 있음에도 더 좋은 것으로 up grade 하고 싶은 마음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제 안에 생기는 질문은, 가구도, 가전제품도, 자동차도, 집도, 업그레이드 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데도 왜 업그레이드 하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주간, 그리고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업그레이드 시켜 보십시다. 논쟁의 거리에 휩싸여 흔들리던 연약한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굳건히 세워 가십시다. 먼저 된 자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우리가 나중 되었다가 먼저 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이전의 ‘내’ 경험과 ‘내’ 관점으로 바라보던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일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