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하시렵니까?
본문: 행 15:22-35
요즘 말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종종 말 실수를 하는 것을 보면서, “아예 말을 하지 말자” 뭐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말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실은 목사라는 점입니다. 대화소통이론에 보면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가운데 의사 소통이 100% 이뤄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소음이 전달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한 자리에 있었는데 엉뚱한 소리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부정확한 발음, 빨리 말하는 습관, 전화벨 소리, 편견, 잡념, 청각적인 장애 등, 제 생각에 제일 큰 소음은 관계의 불신입니다. 이런 소음들을 최소화 해야만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합니다.
평온하던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일어난 것도 ‘말’ 때문이었습니다. 속으로 생각만 할 때는 그 문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꺼낸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이방 기독교인들이 있던 안디옥 교회에 할례의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 교회는 예루살렘에 바울과 바나바를 보냅니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처음 접하는 이방 기독교인의 할례의 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의를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은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인데 무슨 할 말이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 것을 요청하며, 다만 몇 가지 멀리할 것만 적어 편지로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그 편지를 안디옥 교회에 보내는 장면입니다. 내용만 볼 때에는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 편지를 상당히 신중하게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그 편지를 보내기로 가결하면서, 예루살렘 교회 중에서 편지를 전달할 사람을 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안디옥 교회의 몇 사람이 왔기 때문에 그 편에 보내도 될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굳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편지의 내용을 보면,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다고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갔던 것입니다. 할례를 받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런 논쟁을 일으킨 그 어떤 사람들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 그리고 온 교회가 대표를 보내지 않고서는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길을 함께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가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돌아와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결정했다고 전할 때에, 그 어떤 사람들이 순순히 그 결정을 받아들일 지는 미지수입니다. 아마도 그걸 어떻게 믿냐고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안디옥 교회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논쟁을 통해서, 교회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보다 확실한 입장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들이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려 그들의 에너지를 오고 가고 하는 데 소모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역사하셨고, 사도들이 가는 길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증거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논쟁 때문에 교회가 지불해야 했던 소모적인 시간과 에너지는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것은 유다와 실라의 손에 들린 편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편지와 인도자들을 보내면서, 그것이 성령과 우리가 함께 결정한 것임을 전달하였습니다. 단순히 문제를 일으킨 어떤 사람들의 기를 확실하게 죽이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과 함께 결정한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성령과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종종 기도하고 결정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믿는 우리는 모든 일을 기도하고 나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 뜻대로 순종해서 하는 일이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자신이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통보한 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결정한 일’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성령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을 이용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결정한 일임에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나고, 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편지에, 바나바와 바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안디옥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한 마디로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사람이니 그렇다고 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다소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바울의 과거 때문에 사도들로부터 환영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과 항상 직접 동행하면서 배웠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던 것과 달리, 바울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문제 삼아 바울의 사도성에 그 어떤 자들이 시비를 걸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를 받든지 못 받든지 거기에 연연해 할 사람은 아니지요.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편지가 안디옥 교회에서 읽혀질 때에, 최소한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을 더욱 신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성도의 사역을 지지하고 세워주는 역할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지도자들을 통해 편지를 보내서 교회를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전에 바나바가 권위자라고 불리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권위자는 권면할 수 있는 위로자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약한 자들 앞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전 경험을 보면, 아랫사람을 깎아 내려야만 자신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리더십을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야 그 권위가 세워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리더십을 존경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세워주는 리더들은 겉으로는 권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존경을 받으며 그 리더십을 잘 발휘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세상의 권위는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 사람이 많거나, 돈이 있거나, 지위가 높으면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권위를 세웁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권위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자기 세력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지위가 높지 않아도, 힘이 없어도, 교회 안에서는 권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런 권위자들이 많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그 편지가 담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의는 지난 주에도 잠시 나누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은 것과 음행을 멀리 하되, 그것도 스스로 삼가면 잘 될 것이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권위와 예루살렘 교회의 위치를 생각하면 강제적인 명령이라고 말해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오히려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삼가도록 권면하는 것이 교회적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오래갈 뿐 아니라 하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희의 권면을 통해서 교회가 굳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할례의 문제로 흔들렸던 안디옥 교회가 이제는 굳건히 세워진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였습니다. 어떤 말이었을까요? 27절에 이 일을 말로 전한다고 했으니 교회의 결정된 바를 말로 전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도 선지자라고 소개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지자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던 것입니다. 교회가 혼란하고 어지러울 때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항상 원칙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때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 아니면 저렇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 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저울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입니다.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명확합니다. 대답은 단순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기로 작정하면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아직 우리가 주님의 기준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 하는 문제가 있으십니까? 마음을 정하십시오. 두 마음을 가지고는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삶이 꼬이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57:7) 즐겁고 기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재앙이 닥쳐오고, 자기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이 있고,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고, 내 영혼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눈 앞에 닥친 현실만 볼 때에는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혼란스러워야 할 때입니다. 그 때에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듭니다. 그리고 오직 주께 마음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에는 이러저러한 교회의 결정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편지를 전하여 읽은 것을 한 마디로 ‘위로한 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편지와 그들이 전하여준 말이 안디옥 교회에게 용기를 주는 위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똑 같이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온 어떤 사람들은 말로 안디옥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말로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하였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위로한 말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나아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로 교회를 진정시키고 굳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할지는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와 유다와 실라의 권면의 말로 교회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말씀을 배우며 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제가 자라난 목사관은 북아현동 과일 도매상이 있던 골목 뒤에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몇 그루 나무가 있던 탓에 새들이 아침마다 날아와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소리는 시장에서 욕을 해대며 싸우는 소리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야채를 파시던 욕쟁이 할아버지는 손님에게도 욕을 하며 물건을 팔고 뭐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침에 머리 잡고 싸우던 사람들이 저녁에는 또 같이 윷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되는 생활입니다. 손님 하나 기분 나빠 가면 또 다른 손님 받으면 되지 하는 자기 중심의 사회입니다.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문제 없으니, 가게를 꾸밀 필요도, 개선할 필요도 없는 그런 시장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나도록 전혀 발전이 없던 그런 곳이었지요. 만일 백화점에서 그렇게 장사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냥 속 편하게 성 앤드류 교회에서 있었으면 어땠을까? 재정적인 부담도 없고, 복잡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이 더 나았을까?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던지 말던지 “그냥 냅둬유, 이렇게 살다 죽게”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우리가 그런 식의 태도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제가 만일 지금 “다 포기하고 성 앤드류로 다시 돌아갑시다” 라고 해서 그렇게 할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하십시다.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런 말을 하십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인격을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가 우리 신앙의 수준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우리의 품격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는 그것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일들을 계속 경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무슨 말이 가장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그 말들은 어떻게 전달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