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본문:  행 14:8-18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할 때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하였지요. 그럼에도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할 때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 성내 무리가 유대인을 좇거나, 두 사도를 좇는 무리로 나뉘었고, 또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알고 도망하여 온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인 루스드라입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가 “앉았는데” 라는 말은 그의 신체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 두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복음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무리 중에 섞여서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he had faith to be healed” (NIV)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는”이라고 번역합니다(표준새번역). 그 말이 “내가 나을 수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나를 낮게 해주실 거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게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왜 바울이 무리 가운데 유독 그를 주목해서 보았을까요? 행색이 초라한 앉은뱅이였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시선을 주목시켰던 것은 바로 그 앉은뱅이의 “들음” 때문입니다. 그가 듣는 모습이 유독 무리 중에서 바울의 시선을 고정시켰을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서면 참 신기하게도 성도들의 얼굴이 다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두가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들으면서 딴생각 하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회중 전체가 말씀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회중이 갖고 있는 독특한 영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잘못된 청중의 자세 6가지를 적어 놓은 글이 있더군요. (1) 끄떡거리는 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떡거리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듣지 않고 딴 생각하는 사람이랍니다. (2) 돼지 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 막으며 자기 말만 하는 사람, (3) 빈칸 채우기 형은 다른 사람의 말 전체를 듣지 않고 일부만 들으면서 나머지 부분은 자기 생각으로 채워 넣어 나름대로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4) 꿀벌 형은 자기에게 흥미가 있거나 중요한 내용만 골라서 듣고 나머지는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5) 귀머거리 형은 남의 말에 완전히 귀를 닫고 전혀 듣지 않는 사람, 그리고 (6) 창던지기 형은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못하기를 기다리다가, 실수하면 창을 던지듯 반박하는 사람이랍니다. 저도 글을 읽으며 듣는 태도에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말씀을 사모하여 집중해서 들으시는 분들이 절대적으로 많지요. 어쨌든 이 자리에서 그게 다 보이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감사하게도 오시는 강사님들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을 잘 받는 교회라고 하시곤 합니다. 쭉 말씀을 잘 듣는 그런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들었다는 원어(아쿠오)는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열심히 듣고,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앉은뱅이는 바울의 말하는 것을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호기심에 구경하러 나온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바울의 말’로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리고 이고니온에서도 ‘바울이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했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행13:45). 바울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았었지요. 반면에 오늘 등장하는 이 앉은뱅이는 바울의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본 바울이 큰소리로 외칩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갑자기 황당하기 그지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에는 그래도 서로 시선이 마주치고, 나는 은과 금은 없거니와 뭐 이러면서 잠시 설명도 했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는데, 바울은 다짜고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큰소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의 외침이 끝나자 마자 그 사람이 뛰어 걷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즉각적인 사건입니다. 앉은뱅이 안에는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이미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크게 외치자 마자 곧바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가 뛰어 걷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란,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란, 결국, 바울의 큰 소리에 곧바로 순종하여 자기 발로 일어서는 믿음이 앉은뱅이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앉은뱅이가 바울의 외침에 주저주저하고 있었다면 뛰어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라고 믿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설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바울의 말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열심히 듣고, 지속적으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믿음의 반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들음은 청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듣는다는 것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들음은 곧 순종인 것입니다. 왜 듣는 것이 중요합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 역시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롬10:17). 여러분, 들음에 더욱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만큼 들을 수 있느냐, 얼마나 듣고 있느냐가 결국 하나님을 얼마나 믿느냐, 우리 믿음의 분량이 얼마나 되느냐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앉은뱅이가 말씀을 들음으로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그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칠 수 있는 바울의 믿음도 있었기에 기적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믿음과 믿음이 만날 때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봐도,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치는 믿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제 책임입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뛰어 걷게 된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의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외침에 곧바로 일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걸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걷는 것을 보면서 누구보다도 부러워하고, 걷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내가 어떻게 걸을 수 있겠냐고 미리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기 전에 생각이 많습니다. 판단이 먼저 앞섭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냐고요?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겠냐고 먼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은 연고입니다. 오죽 답답하시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 손이 짧아졌냐? 라고 까지 반문하셨겠습니까? (민11:23) 그래서 수 없이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이스라엘아 들으라” 는 것입니다 (신6:4-5). 오죽하면 듣지 않았으면,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듣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적이 일어난 이후의 일입니다. 무리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그 앉은뱅이가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던 사람인 것을 알고 있는데 그가 뛰어 걷는 것을 보며 놀랐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보고서는 쓰스(Zeus)와 허메(Hermes)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쓰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를 말하고, 허메는 웅변의 신인 머큐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를 드리겠다고까지 요란을 떱니다. 무리가 두 사도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겼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취한 행동입니다. 눈으로 기적을 보고서 고작 한 것이 사람을 신들로 여겨 제사를 하겠다고, 소와 화관을 들고 이리저리 소란을 피우는 일이었습니다.

 

앉은뱅이가 ‘바울의 말한 것을 듣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졌던 것과는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무리들도 분명 바울이 말한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기적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기적을 보면서도 그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여준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반응하는 얄팍한 믿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들은 말씀만으로도 깊은 믿음을 갖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쨌든지 루스드라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질러 외칩니다. 좀 과격한 반응이다 싶지만, 두 사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급박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하십니까? 우리는 여러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표준새번역)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으로 모여 들었을 때에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주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분명한 이유를 소리를 질러 외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합니다. 사람에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생각 안에 갇혀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경험 안에 갇혀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계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어야만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모든 족속에게도,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도 돌보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지요. 당연히 믿지요. 하지만 ……” 여러분, 우리가 여전히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포기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다고 해도 나를 돌보아주고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능력 보다 우리 삶의 문제와 어려운 환경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이전의 일들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버려야만 합니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는 이유는, 아직도 그것이 헛된 것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알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다는 것을 보면, 끝까지 헛된 것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겨우 무리를 말렸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군함 한 척이 바다에 떠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똑 같은 배가 두 대가 더 필요합니다. 결국 함정 세 대가 있어야만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 대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한 대는 임무를 수행하고 휴식을 취하며 다음 출정을 위해 준비합니다. 그리고 또 한 대는 정비하는 것입니다. 수리는 고장이 난 후에 하는 것이지만, 정비는 미리미리 점검해서 고장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정비가 필요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디를 정비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잘 들리는지,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 한 번 일어나 보십시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나 본 적이 없다고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다. 들음을 통해 믿음을 얻고, 믿음의 부름이 있을 때, 바로 순종하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해 보십시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결국 우리 믿음의 정도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자리를 얼마나 내어 드리느냐가 내 믿음의 크기 입니다. 일부만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전부 다 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들음의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놀라운 기적이 계속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