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본문: 행 14:1-7
지난 주의 말씀을 이어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다음 안식일에 또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다음 안식일이 되어,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습니다. 했던 설교 또 듣겠다고 그 많은 무리가 모인 것입니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합니다. 그리고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을 보면, 성령께 붙잡힌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해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간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인 이고니온입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게 됩니다. ‘이에’라고 했지만, 형편을 보면 쫓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경을 통해서도 바울과 바나바를 말씀이 필요한 곳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만일 바울과 바나바가 변박하고 비방하는 소수의 유대인들과 씨름하느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를 소모했다면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은 그만큼 늦어졌을 것입니다. ‘이에’ 라는 환경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거나 불순종의 핑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오히려 두 사도가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문장이 이렇게 시작하면 참 좋았을 텐데, 그 다음 문장은 ‘그러나’ 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믿는 형제들 (공동번역), 믿는 사람들 (표준새번역)에 대해서 악의, 나쁜 감정을 품게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부추긴 것도 그렇지만, 믿는 형제들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갖도록 물들인 것입니다. 영어로 보면 느낌이 확실합니다. “poisoned their minds against the brothers.” 형제들을 대적하도록 그들의 마음에 독을 집어 넣는 행위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본문은 그 유대인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형제들에 대해 악감을 품게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NIV 는 유대인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But the Jews who refused to believe” 못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순종을 하느냐 마느냐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의 회당에서 말할 때에 허다한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비시다아 안디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고니온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이 되느냐, 명사에 관심을 둡니다. 하지만 우리를 나타내주는 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와 같이 그 명사를 꾸며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목사냐 나쁜 목사냐는 목사를 꾸며주는 형용사에 따라 정 반대의 목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꾸며주는 형용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온갖 아름다운 말로 스스로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 형용사가 때로는 잘못 붙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 앞에 붙이시는 형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형용사를 붙여 주시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이에 대한 두 사도의 반응을 보면 오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 버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기다렸을 것입니다. 믿음을 거부하던 자들이,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 믿음을 갖고 충성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오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여유와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하여 어떻게 되나 오래 지켜본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말씀을 붙잡고 오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히 말했던 것입니다. 담대하다는 말은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하다는 말입니다. 담대(膽大)는 ‘쓸개 담자’ 에 클’ 대’ 자입니다. 한 마디로 쓸개가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담대함은 쓸개가 커서가 아닙니다. 기죽을 성격이 아니어서도 아니고, 지식과 경험이 많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변박하고 비방할 때에도 담대히 말했었지요(13:46).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라고 고백했던 시편의 기자와 같은 마음이었지 싶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문제나 상황 앞에서 염려하고 좌절하고 소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저희 손을 통해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였지만, 저희가 한 것이 아닙니다.자기 은혜의 말씀을 친히 증거하기 위해 주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목적을 잊지 마십시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고 경험한 기쁨에 멈추어 서지 마십시오. 표지판 잘 만들었다고 그것만 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표적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친히 주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는 사도들을 통해 행하셨습니다.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어야 합니까? 사도들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여 주셨다면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믿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였어야 했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선동에 물들어 형제들에 대해 악감을 품었던 이방인들도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전해줍니다.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사도들이 말할 때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곧 주의 은혜의 말씀이 증거되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성내 무리가 나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하기 전, 이집트의 바로는 각종 재앙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졌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던 제자들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고도 했습니다(요6:66). 보여 주신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려 주신다고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으십니까? 들리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는 진단표로 삼으십시오. 시기가 가득하고, 변박하고, 비방하고, 선동하고, 핍박하고, 쫓아내고, 악감을 품게 하고, 무리가 나뉘게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영이 하는 일들입니다.
나뉘어진 두 무리가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다른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는 자리에 모두 있었습니다.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는 그곳에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허다한 무리가 믿고 있는 상황이지만, 믿기를 거부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통해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는데도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 보이십니까? 그리고 누구를 좇아 가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었다는 말은 사람을 좇아 갔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전에 우리가 좇아가던 일들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엡4:3) 그것은 두 무리로 나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도 나의 마음이 나뉘는 경험을 자주하게 됩니다. 두 마음을 품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를 힘입어 담대히 싸워 이겨야 하는 나 자신의 영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먼저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람 변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는 완고함에 대한 변명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기준이 바뀌면 우리는 당연히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아직 바뀌지 않았다면 여전히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내 삶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7:21). 행위는 최대치가 아닙니다. 행위가 있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행위는 최소치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행함도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그리 호전되지 않습니다. 두 무리로 나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그들이 한데 어울려, 합세해서, 한 패가 되어 사도들을 학대하고 핍박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도 목적이 선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이유는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서로 격려하고,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의 공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사단의 도구로 이용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더 나아지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주를 힘입어 담대히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두 사도를 학대하고 핍박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돌로 치려고 달려듭니다.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죽이자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의 기준으로 돌로 쳐 죽여도 될만한 이유들을 찾아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사도들이 알고 도망했으니 말입니다. 합세해서, 한패가 되어 이젠 죽이기로 결의해서, 와 하고 몰려오는 소식을 미리 들었지 싶습니다. 어쨌든지 두 사도의 모양새가 형편 없습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씀을 전하고,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도망을 가는 것입니까? 차라리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순교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죽음도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명이 끝나지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고, 아니 죽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다고 했습니다. 도망간 바울을 쫓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설득하고, 부추기고, 충동질해서 바울에게 결국 돌을 던지게 했습니다. 죽은 줄로 알고 바울을 성밖에 끌어 버릴 정도로 돌에 맞습니다. 돌에 맞았기 때문에 죽었어야 했다면 그 때 바울의 삶은 끝났어야 합니다. 하지만 4:20절에 보면,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그렇게 거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하루의 생명은 곧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놓치면 그것은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난 바울이 이튿날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사명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사람들이 죽었다고 버린 다음 날에도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오늘 본문의 상황 쯤이야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망을 갔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다락방에 숨어 지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떠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변에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의 방해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악감을 품게 하는 믿음을 거부한 사람들의 선동이 있습니까? 우리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위협이 있습니까? 우리가 도망쳐야 할 그런 어려운 환경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잡으십시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십시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그 환경에 지배 받는 자신의 연약한 믿음이 문제입니다.
얼마 전 사용했던 예화이지만, 적절한 것 같아 다시 사용합니다. 존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5월 5일 오전 세인트 앤 교회에서 설교, 그들의 반응, “가서 다시 오지 마시오!” 5월 12일 오전, 세인트 유다 교회에서 설교, 다시는 그곳에 갈 수 없음. 같은 날 오후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설교, 다시 쫓겨남. 5월 19일 오전 세인트 앤드류 교회에서 설교, 장로들이 긴급 모임 후 다시 오지 말 것을 요청함. 같은 날 오후, 거리에서 설교, 내쫓겼음. 5월 26일 오전 초원에서 설교, 풀어놓은 황소에게 쫓김. 6월 2일 오전 마을 변두리에서 설교, 경찰에게 추방당함. 같은 날 오후 어느 목장에서 설교, 일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
한 명의 청중이 있으면 실패요, 만 명의 청중에게 설교했으면 성공한 것이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어 드렸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성공은 얼마나 충성되게 그 씨를 뿌렸느냐 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오직 주를 힘입어 담대히 오래 있어 전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는 일꾼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아니, 일평생 주를 힘입고 살아가십시다. 내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십시다. 돌로 치려 달려드는 무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마십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중간 지역이 없습니다. 믿느냐 믿는 것을 거부하느냐 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주신 사명을 감당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열악한 환경이 바뀌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사명을 감당할 때에, 그 환경까지도 바뀌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