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본문: 행 13:42-52
올해 교회 표어인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한두 번 더 설교하려고 했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충성을 너무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 성도님들에게 적지 않은 거룩한 부담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지난 주일 성경공부 시간에 참여한 교우들과 공부를 하던 중에 제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올해 표어를 마음 속 깊이 묵상하고 계신 분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우리가 죽도록 충성해야 할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빌립보서(2:8)의 말씀을 떠올리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크리스천인 이상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덧붙이시기를, 각자의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 때가 아니라, “코 끝에 있다”고 하시더군요. 분명한 심판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 있겠지만,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면 다시금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표현에 ‘저작권’을 신청하시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아는 말씀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 자꾸 그 말씀을 반복하시는 지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계속 반복적으로 들리는 말씀이 있다면 집중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설교한 이후에 일어난 반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가 우리에겐 생소하지 않습니다. 다 아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는 내용을 듣거나, 읽을 때에는 대충 넘어가곤 합니다. 이미 다 아는 것인데 다시 듣거나 읽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회당을 나서는 바울의 일행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로 바꾸면, 오늘 했던 설교를 다시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목사님들이 했던 설교 다시 하면 교인들이 먼저 압니다. 말씀은 그렇다 치고, 예화를 두 번 사용했다가는 게으른 목사로 욕먹기 딱 좋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예화를 찾아 헤매고, 뭔가 새로운 각도로 말씀을 해석하는데 시간을 더 쓰는 것이 현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전달하려는 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말씀만 전하면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무시당하기 딱 좋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나 듣는 회중 모두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몇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음 안식일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했던 설교 다시 한다고 했는데,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습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야 합니다. 세계 정치 구도가 어떻게 될지 제게 들으려 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언제쯤 이 경제난이 회복될지 예측해주기를 기대하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전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보다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저는 세상의 지식과 경험을 이야기 할 수준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설교를 통해서 듣고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뭘 그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슈?” 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듣는 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로 들으려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들이나 듣는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고자 했기 때문이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처음 회당에서 바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끼친 영향력 때문일 것입니다. 전하지 않았는데, 그 말씀을 들으려 온 성이 거의 다 모일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43절,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집회가 다 끝난 후에도 말씀을 더 사모하여 따라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분위기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넘치면, 집회가 다 끝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서로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모임이 이어집니다. 반면에 교회가 힘들고 시험에 들면, 축도 끝나자마자 썰물 빠져나가듯이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가장 큰 책임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분명 영적인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목적으로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기 때문에 엉뚱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보면, 메뚜기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새벽 예배는 어디가 좋다더라, 수요 예배는 어느 교회가, 금요철야기도회는 어디가 뜨겁다더라 이렇게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신앙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뜨거운 것 같지만,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는 결코 믿음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귀를 즐겁게 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은혜 받기 위해 시간을 쓰는 만큼 은혜 받은 자로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는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수 없는 귀한 말씀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손꼽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거의 실시간으로 집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귀는 높아졌는데, 내 손과 발은 들은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아니 말씀을 듣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전해보시오’ 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행위는 같을 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도 폐회 후에 자신들을 좇는 사람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했지 싶습니다. 사람을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좇아간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항상 그래야 합니다. 그 은혜가 계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선물이지만,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거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모두가 은혜 위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은혜가 계속되지 못한다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가면 늘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 사람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어” 하는데 그곳이 엉뚱한 곳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다음 안식일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을 때에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온 성이 거의 다 모이는 영적인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유대인들은 소수였을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온 성을 한 방향으로 인도해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분명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온 성이 거의 다 모여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반면에 일부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말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가 가득했던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면 결코 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은혜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은혜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합니다. 변박하고 비방하는 사람들 앞에서 기죽을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로 향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자신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버렸습니다. 구원받지 못할 자로 자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였던 거의 대부분의 무리들은 더욱 기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을 이방의 빛을 삼아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들을 때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유대인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원래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자 유대교에 입교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듣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 그것은 예정론의 교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교리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리라 우리의 믿음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믿음을 바르게 세워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해석이 말씀 자체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대학원에서 제 전공이 조직신학이었는데, 교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그런 오류에 빠집니다. 자기가 이해하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물론 이단을 구별해야 합니다만, 이단 논쟁이나 교리 논쟁은 정치적인 이유일 때가 더 많습니다.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집중해야 하는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탄은 끊임없이 시기하고 변박하고 비방하는 일들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자고 따지는 것이 변박입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옳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이 오히려 틀렸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질 때에 영적인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어떤 일들을 했습니까?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냈습니다.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깜쪽 같이 위장하고 그럴듯한 말로 꾸며서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선동하는 유대인들만 문제가 아닙니다. 그 선동에 이용당하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경건한 귀부인이었습니다. 그 성내의 유력자들이었습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할 지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 영향력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사용했다면 분명 그들의 이름이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선동하는 유대인들의 말을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동하는 말에 더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마음에 엉뚱한 생각을 집어 넣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하는 행동도 잘 살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변박하고, 비방하며, 선동하며, 쫓아내는 삶을 살고 있다면 심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 이상한 일은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 빨리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파괴적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더 주의해야 할 것은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말을 전달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직접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시간에 오히려 기도하십시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30년이 걸리지만,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3개월이면 된다고들 합니다. 때문에 영적인 분위기를 해치는 말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부흥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탄의 방해도 따라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씨름하면서 영적인 싸움을 하느라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싸우자고 했다면 분명히 이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핍박하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귀부인들 그리고 그 성내 유력자들을 향해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방인처럼 여겼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본연의 임무인 땅 끝까지 이방의 빛을 삼아 복음을 전하러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박하고 비방하고 선동하는 일에 기웃거리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떨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변박과 비방과 핍박과 선동에 붙잡혀 우리의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은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주의 말씀을 찬송하며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36장은 K. Hankey라는 분이 1866년 위독한 병에 걸렸을 때 쓴 것입니다. 원래는 전체가 50절로 된 장편시였습니다. 듣고 싶었던 이야기(The story wanted), 들은 이야기입니다(The story told)로 나뉘어 있습니다. “Tell me the old, old story, Tell me the old, old story, Tell me the old, old story, Of Jesus and His love” 직역하면, 그 오래 오래된 이야기 말해주시오. 그 했던 이야기 말해주시오. 예수님 그리고 그분 사랑의 오래된 이야기 전해주시오. 우리 찬송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1.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 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 듣게 또 들려 주시오 2. 아침의 이슬 방울 쉬 사라짐 같이 내 기억 부족하여 늘 잊기 쉬우니 잘 알아 듣기 쉽게 늘 말해 주시오 날 구속하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3. 주 예수 나를 위해 이세상 오셔서 날 구속하신 은혜 말하여 주시오 나 같은 사람 위해 주 보혈 흘렸네 이 복스러운 말씀 또 들려주시오 4. 이세상 헛된 영광 날 미혹할 때에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들려 주시오 천국의 빛난 영광 내 눈에 비칠 때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후렴]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했던 이야기 또 해달라는 것입니다. 저도 했던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감리사님 취임 예배 때의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Salisbury University 앞에 있는 Asbury UMC에서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모여서 함께 축하했는데, 여러 교회에서 특별 순서를 맡았습니다. 큰 교회 찬양대는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 반주에 맞춰 웅장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독 제 마음을 움직인 찬양대가 있었습니다. 찬양대라고 하기에도 초라한 지팡이 집고 등장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10여명이었습니다. 저분들이 무슨 찬양을 하나 싶어 보는데, 가사는 참 단순했습니다. “주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 찬양이 반복되면 될수록 그 영적인 파워는 대단했습니다. 큰 예배당을 채운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찬송을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당시 교회가 힘들었던 때입니다. 찬송가 두 번 부르면, 왜 또 부르냐고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저렇게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찬양을 드리지 못할까 싶어서 많이 울었습니다. 요즘엔 제게 그런 말씀하시는 분들이 없어서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 찬양은 우리가 듣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듣기 때문에 지겨운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입니다. 수만 번 불러도 지겹다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위한 노래입니다. 아이들 뭐 잘한다 하면 “또 해봐, 또 해봐” 하면서 즐거워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그리고 한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십시다. 항상 은혜 가운데 있어서 어떤 유혹이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 가십시다. 그래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