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죽도록 충성하라

 

본문: 계 2:8-11

 


2010년도 새해 첫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충만한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난 12월 교인 총회 때부터 올해 교회 표어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오늘 제목 그대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원색적이고 촌스럽기 그지 없는 교회 표어를 정한 까닭은 목회 칼럼에 쓴 것처럼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올 한해 우리 교회에 기대하시는 바가 “충성”인 줄로 믿고 표어를 정했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권사의 직분을 받으시는 분들과 더불어 임원으로 헌신하는 분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섬기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제게 ‘충성’이란 단어의 첫 느낌은 조금은 촌스럽기도 하고, 군대 냄새가 나는 그런 단어입니다. 군목으로 섬겼던 해병대의 구호는 반드시 이긴다는 뜻에서 ‘피일씅’ (필승, 必勝)입니다. 중위로 임관하기 위해 삼군 사관학교에서 훈련 받을 때는 부대 구호가 ‘추웅성’ (충성, 忠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이런 구호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은 군대 문화의 부정적인 경험 때문입니다. 군사 독재 정권을 겪었던 분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군대와 관련된 모든 개념들이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계급 사회라는 특수성을 가진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와 폭력이 ‘충성’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되고 묵인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충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충성임을 알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먼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비춰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경험한 ‘충성’ 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끗이 지우고, 하얀 도화지에 새롭게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그려 보기를 바랍니다.

 

충성은 사전적으로는 나라, 조직, 지도자 등을 위해 거역하지 않고 몸을 바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충성은 군대 용어가 아니라 신앙적인 용어입니다. 영어로는 Faithfulness 입니다. Faith + Ful + Ness 신실함이라는 말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충성(ne'eman)은 확실, 진실이라는 뜻의 '아만'('aman)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바울은 충성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하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갈5:22), 또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간구해야 할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전 4:2).

 

성경에서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한자를 봐도 그렇습니다. 옥편에서 충성 충(忠)을, 우리가 알고 있듯 ‘나라와 임금 등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은 두 번째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충성 충의 첫 번 째 뜻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충성인 것입니다.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Faith, 신앙심이 곧 충성인 것입니다. 또 중심(中心)은 또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주신 명령을 따라 가는 믿음의 삶이 곧 충성인 것입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충성의 성(誠)은 정성 성입니다. 옥편을 보니, 거짓이 없는 확실한 말,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 틀림이 없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재미 있는 설명은 사람(人)과 말(言)을 합하여 믿을 신(信)자가 되는데, 신(信, Faith)을 다시금 마음 속의 문제로서 생각한 것이 ‘정성 성’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말은 믿지 못할 것으로 경험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충성이란 한자를 보아도 신앙적인 단어입니다.

 

왜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서머나 교회를 향해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충성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충성은 우리 중심의 문제요,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바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요구하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기 때문에  ‘충성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성하라고 말씀하시는 서머나 교회의 형편을 보니, 충성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지금 교회가 환난 중에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압력에 생존의 위협을 받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궁핍하기까지 합니다. 강제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약탈 당하기도 했습니다. 서머나는 모든 면에서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서머나 교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풍요를 누리는 서머나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빈곤감이 더 크다는 것을 우리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훼방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충성할 수 있습니까? “난 죽어도 못합니다” 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실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분명 환난을 당하고 궁핍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이 오히려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교인들을 훼방하는 자칭 유대인들이라 하는 자들도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입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였던 것입니다. 모여서 하는 일을 보면 사단의 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실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실상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결코 환상에 빠져 꿈을 꾸듯 비현실적으로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환난을 당하고 궁핍한 것처럼 보이나, 그들의 마음 한 가운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실상은 오히려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쓴 만큼만 자기의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평생 다 쓰지도 못하고 갈 것을 쌓아 놓는다고 부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영역에서도 적용됩니다. 아무리 믿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믿는 대로 살아가는 만큼이 자신이 진짜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3:14 이하를 보면, 책망만 받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상은 분명 서머나 교회보다 부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부요하다, 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니 뜨뜻미지근한 신앙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 드립니다만, 신앙은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해져야 합니다 (엡4:13). 만일 우리가 “이 정도면 됐다” 하고서 스스로 만족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고 해도, 우리의 신앙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멈추어 섰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뒤처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충성, 곧 신실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는 그래도 감당할만합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환난과 궁핍 그리고 실상은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의 훼방을 받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일 동안 환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십일 동안’이 문자적으로 열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아주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요한계시록에서 10은 충만한 수입니다. 마지막 때의 고난이 철저할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결코 쉽게 넘어갈 기간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십일 이라고 해도, 혹독한 환난의 시련 가운데 있던 서머나 교인들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이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너무 가혹하게 들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을 받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역시 시험의 때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온 세상에 임할 시험에 대비하라고 경고받는 교회는 칭찬 받는 두 교회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뿐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장차 올 시험을 대비할 수 있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뿐입니다. 시험이 온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으면 말입니다.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시험이 즐겁습니다. 준비를 안 했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한 것입니다. 충분하게 준비했으면 담담하게 시험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교회일수록 더욱 시험이 많이 생깁니다. 사단으로서는 교회가 “잘” 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받은 후에 많은 시험이 오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한 번 믿어볼까 하는데 꼭 가로막는 일들이 생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뭔가 용기를 내서 이번에 꼭 해보려고 하면 기분 상하는 일이 곧바로 생깁니다. 아예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어 보는 것입니다. 그럴 거라면 난 아예 처음부터 믿음을 갖지 않는 게 좋겠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결국 믿음을 가진 자가 승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님께서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속히 임하실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결국 교회가 해야 할 것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흔들어도, 빼앗으려고 해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충성인 것입니다.

 

충성하되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죽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그 중에는 죽음으로 그 믿음을 지켰던 수 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충성하다가도 변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수 많은 권력자들은 바로 가장 신뢰했던 측근들에 의해 암살당했던 경우들이 많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경우가 그런 말이겠지요. 충성은 끝까지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군사 독재정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씨, 전두환씨, 노태우씨 세 사람입니다. 박정희씨는 믿었던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노태우씨는 믿고 따르는 충성된 부하가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전두환씨는 감옥에까지 대신 가겠다는 충성스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흔히들 깡패들이 의리는 있다고 말합니다. 하물며, 여러분 우리가 그런 사람들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사람에 대한 충성과 비교할 수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까? 첫째 사망의 해를 두려워해서 믿음을 잃게 되면, 결국 그보다 더 두려운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첫째 사망의 위협이 물론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둘째 사망의 해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 노래하며 양을 치던 목동이 쓴 시가 아닙니다. 다윗이 만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 유다 광야에서 피난 생활을 할 때에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하도 아니고 자기 아들에게 쫓기는 기가 막힌 신세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충성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 흥겹게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왜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충성입니다. 아니 그렇게 죽게 하시더라도 마음 한 가운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겠다는 믿음이 바로 충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2010년도 우리 한 번 죽도록 충성해 보십시다. 마귀에게 틈을 보여서 옥에 던져 시험을 받는 몇 사람이 되지 마십시다.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에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를 가지고 살아 가십시다. 눈에 보이는 환난과 궁핍과 훼방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2010년도 한해 우리 모두에게 환난과 궁핍과 훼방을 이겨내고, 승리의 환호를 올리는 복된 일들이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