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본문 13:23-41
연말이 되면 각종 시상식이 많습니다. 한 해 동안 뛰어난 성과를 이룬 사람들에게 격려하는 상을 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하늘 상급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상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세상의 영예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관심 거리입니다. TV나 영화 배우들 중에 누가 주연상을 받느냐도 관심 대상입니다. 그런데 주연이 돋보이려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조연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조연상도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TV가 귀하던 시절에는 화면에 나오기만 해도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어린이들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뭐 이런 노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가끔 뉴스 보도를 보면, 리포터들이 방송을 할 때 뒤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손으로 V 자를 그리며 얼굴 한번 나오려고 하는 장면을 자주 보았습니다. 만일 영화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 배우들이 주연보다 좀더 튀어보려고 지나치게 연기를 하거나 필요 없이 카메라를 쳐다보면, 주연의 연기가 빛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맡은 역할에만 충실할 때 좋은 조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왠 주연 조연 타령이냐 싶으실 것입니다. 저는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이 좋은 조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회당장들의 권고로 복음을 전할 때, 그 주인공은 분명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의 주인공 예수님이 등장하기까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조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선지자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려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24),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6),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7).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29).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2),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33),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35),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40), 일렀으되 (41). 바울이 지금 손짓을 하며 전하려고 애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그 분이라는 사실을 거듭 전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씀 그대로,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리키는 이 구원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1:14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라고 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자지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안식일마다 외우는 선지자들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외우는데도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작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에도 무지해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구원의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조차도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고 했던 바로 그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자신들은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믿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바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하셨는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고 경험하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에 대해서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도 말이 말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말 바꾸는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거짓말도 말입니다.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믿지 못합니다. 다 자기 같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자신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18:18-22,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세우시는 것은, ‘내 말’을 그 입에 두어 무리에게 그대로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중에 하나님께서 고하라고 하지 않으셨는데도, 어떤 선지자가 방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 하실 분들이 있는 것도 아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고 선지자가 방자히 말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강조하는 대로,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던 예언의 말씀이 지금 다 이루어졌습니다. 증험도 있고 성취함도 있습니다. 그 말씀을 안식일마다 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그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행위는 있었지만, 실은 믿음은 없었던 까닭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는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포합니다.
여러분 믿음 없이도 행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행함만 보고서는 믿음이 있는 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때문에 행함은 최대가 아니라 최소입니다. 행함도 없으면서 나는 믿노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조롱합니다. 믿음의 눈이 없으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리이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실은 그들이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것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을 지금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했다면, 그 뜻을 아직 깨닫기도 전에 유대인들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유대인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복음에 무식한 자들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과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자들을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26절 영어 본문을 보면,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이방인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you God-fearing Gentiles”,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중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유식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실은 무식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 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으로 내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른 것뿐입니다. 영적인 감수성이 다를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영적인 세계에 대해 뭘 알겠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지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18:3). 예수님의 말씀에 신속히 반응했던 수 많은 성경 속의 조연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리고, 무식하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가득 찬 어른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바리새인들과 가진 자들은 오히려 호되게 책망을 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외우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열 개 외우나 만개 외우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부분만큼만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최대의 자를 가지고 하나님을 측량하고서, 하나님이 그 자 안에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이 이렇다 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의 차이는 최대 겨자씨만큼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가 아니라 겨자씨 키 재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전하려는 것은 썩어질 것과 썩지 않을 것을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모세의 율법도 결국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 영원을 바라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9년도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2010년이 이제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지나간 세월은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입니다. 해가 바뀌는 것은 영원이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을 놓고 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매일매일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단지 그것을 끊어서 day, month, year로 구분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을 붙잡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마십시다. 내년에 꼭 하겠다고 다짐하는 일들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는 헛된 것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붙잡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마십시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말씀에 충실한 조연이 되어서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천국에서 조연상은 주시지 싶습니다. 올 한해도 허락하신 은혜가 내년에도 풍성히 임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